2011년 9월 21일 수요일

소래산에서 나무에게 고개 숙이다.


소래산이 가을 문턱인데도 여름느낌을 떨치지 못하는 듯 녹음이 짙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흙내음이 묻어 올라온다. 그런데 오늘은 언제나 숲으로 들어오면 느끼는 청량함이 덜 하다. 뭔가 산다움이 옅어진 느낌이다.

숲은 보기 위한 조경의 장이 아니다. 숲이 가지고 있는 가장 경이로운 점은 바로 생명의 기운이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어우러짐이다. 다양한 종들의 와글거림이다. 사람들은 콘크리트를 벗어나 다양한 종들의 와글거림에 들어옴으로써 온갖 화학물질로 뒤집어쓴 피부를 숲의 기운으로 닦아낸다. 욕망이 빚어낸 갈등과 고뇌를 숲이 닦아준다. 이 순간 자신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정상에서의 기도, 바위돌쌓기라도 하며 숲에 소원을 빌어보기도 한다.
바람도 잦아들어 늦더위를 제대로 받아 안는다. 조경사업으로 정원처럼 되어버린 소래동산(?)을 딛고 올라가니 카메라에 담기 민망한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상수리나무다.
아주 잘 보이게 떡하니 이름표를 커다랗게 붙이고 서 있다. 상수리나무다.
오고가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그토록 궁금해해야하는 상수리나무 이름표를 쳐다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저 부지런히 앞만 보고 산을 오를 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산을 찾는 사람들은 산에 운동하러 오는가 보다. 숲에 들어오면서 숲의 기운을 깊숙이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아마도 행정기관이 산을 조경동산으로 생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수리나무 이름표를 달아놓은 끈을 살펴본다.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재질이 아니다. 아주 단단해서 끊어지지 않는 재질이다.
이 대목에서 이 줄을 묶은 사람의 마음이 느껴진다. 분명 이 사람은 나무를 가구로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나무는 가운데(심)가 죽은 부분이다. 가구로 사용되는 부분이라는 뜻이다. 나무의 살아있는 부분은 바로 나무껍질(수피)바로 밑이다.
나무 줄기가 부피생장하는 것쯤은 초등학교에서도 배운다. 줄기는 부피생장, 맨 끝가지 생장점에서 길이생장하는 정도는 상식이다.
부피생장이란 줄기가 뚱뚱해지는 것이다. 몸이 뚱뚱해지면서 단단한 줄이 매여 있으면 어찌 되겠는가, 뱃살을 빼려고 단단히 졸라매고 다이어트 하는 사람들처럼 나무도 다이어트 하는 줄 아는가 보다.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다. 이러고도 버젓이 공공기관 시흥시란 이름을 붙여놓았다. 시흥시민들이 식물공부라도 하게 하려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일까?
이름표는 숲과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나마 목조이듯 매어 놓은 이름표 여러 개가 찢어져서 너덜거린다. 숲은 그대로의 숲이어야 생명인 것이다. 나무와의 소통이란 나무를 생명체로 받아들이는 감성적 자극에서 비롯된다.
사람의 발 아니, 신발은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지 모른다. 사람이 밟은 땅은 풀 한 포기 안자란다. 단단히 밟혀 마치 사막처럼 생명이 뚫고 올라오지 못한다. 맨발로는 산에서 뛰지 못한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밟고 오를 것이다. 숲에 있는 어느 것 하나 상처주지 않고 말이다.
숲에 올 때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 숲에 있는 다른 생명체에 대한 해를 주지 않도록 작은 배려가 있어야 한다. 큰소리로 웃고 떠들지 않기, 숲에 있는 작은 돌 하나라도 주워오지 않기, 운동장으로 여기지 않기. 숲에 있는 생명하나라도 경외심을 갖고 바라봐주기 등 , 돈 안 들고 힘 안 드는, 조금만 배려하면 되는 예의정도 갖추고 숲에 가자.
가을 문턱, 소래산에서 나무에게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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